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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 독서 이야기

안중근 평전

버들아 2015. 10. 28. 14:58

안중근 평전 / 김삼웅 / 시대의 창

 

 

 

 

도무지 무슨 말과 글을 적어야 할 지 모르겠다. 어떻게 이 분은 그리고 그 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은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 도서관에서 세월이나 죽이는 나같은 범인은 범접 자체를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다 읽고 난 다음에는 그 카리스마를 책에서도 느낀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그냥 막 떠오르는 생각이 정리도 안되어서 한 두번 정리를 하려고 맘 먹었지만 그냥 막 적어 넣기로 한다.

 

 

 

 

책은 내용은 다음과 같이 흐른다.

가족사
세례를 받게 된 배경
신부와 주교와의 관계
주요 활동
이등박문 토살과 토살 후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
옥중 활동
죽음 이후의 일제 만행
의사를 기리는 문필가들의 시
지바 등 수감 중 헌병 교도관들과 판.검사들 그리고 관선 변호사들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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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발딛고 서 있는 땅이 빌어먹을 곳이 되는냐 아니냐는 어떤 것으로 판단 할 수 있을까 ?  하나의 잣대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나를 규정짓는 내부의 계급 기준 또한 고려해볼 일이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흔히 우리가 말하는 민중이다. 보편적인 일반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21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 즉 인민이 역사의 주인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 역사의 주인이라 함은 기록되어진 수십 세기 동안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본 적이 있느냐는 말이다. 무지한 내가 보기에도 기억해내기는 어려울 만큼 아주 소수라 생각된다.

 

썩어 문드러진 구한말의 상황과 일제에 국토와 주권을 강탈 당했던 시기까지 과연 민중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어떠한 생각이 지배적이 었을까 ? 불타는 애국심과 분기탱천한 기운으로 강도 왜놈들을 때려 잡고 국권을 회복하는데 이 한몸 바치겠다고 생각했을까 ? 인성을 넘어 신성을 지녔던 안중근 의사라 할지라도 그 시절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었을까 ? 단언컨데 아니라고 본다.


더이상 썩을 것이 없을것만 같았던 현실 속에 민중들은 현실을 지탱하기에도 버거웠을 것이다. 오죽 했으면 곡괭이와 죽창을 들고 자동 소총 앞에 맞섯을까. 사회 지배계급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멸사봉공의 정신은 그 사회의 지배계급에는 당연히 필요한 덕목이다.  철저한 봉공의 정신 즉 민중을 대하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야만 진정한 지도층 인사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민중은 뒤돌아서 침을 뱉고 욕을 할 뿐이다.  지리멸렬한 민중의 삶 속에서는 민주주의가 꽃피기 어려울 뿐더러 민주주의 사회를 더 빨리 앞당기기 위해서는 민중이 스스로 의식 개혁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즉 어중이 떠중이 못난이 잘난이 모두를 넉넉히 받아 줄 수 있는 사회의 정신적인 크기를 키워내야 하며 그 핵심적인 리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지도층 인사들인 것이다. 하여 타의 모범이 반드시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들이다. 민중이 마음 속으로 따를 만한 사람이 그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죽였다고 일관되게 변론을 펼쳤다.  조선 뿐만 아니라 이웃한 나라까지 아울러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묘책을 미완의 옥중 저술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원죄를 이등박문에게 물어 그를 토살하였고, 현재의 상황을 평화적 국면으로 전환하고 먼 미래의 상생적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내어 놓았다.  민중과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의 토대가 없이, 국제 정세를 통찰하는 안목없이, 멸사봉공의 정신없이는 이러한 구상과 실천적 행동이 나오지 못할 것이라 단언한다.  범인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정신과 행동이라 감히 생각한다.  민중과 국가 나아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진성한 국가간의 협의체를 구상한 안의사는 가벼운 입으로 담기에는 너무나 너무나 무거운 분이고 또한 거룩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와 성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무인 기질이 강했음 - 특히 사격에서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함.
아버지 안태훈의 개화사상과 가톨릭 사상을 받아 들임
아버지 안태훈의 동학혁명군과 대치 및 토벌에 앞장섬
청년 접주였던 백범 김구 선생과 사전 합의로 상호 공격하지 않음
사전에 서로를 조금 알고 있었고 호감이었다는 뜻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19세에 영세를 받았음
중국의 상해 등지를 미리 둘러보고 오면서 프랑스 곽신부를 만나 조언을 듣고  청계동에서 진남포로 이사한다. 이즈음 아버지 안태훈이 사망.
남포에서 프랑스 신부와 상의하여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려고 하였으나 서울의 뮤텔 주교가 반대(교육하면 신앙에 정진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 즉, 전교 외에는 한국에서 하지 않겠다는말)하여 낙담, 실망하고 진남포에서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설립한다.
두 학교는 공근, 정근 두 아우에게 맏기고 의병 활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다.

의병활동을 위해 북간도 등지를 둘러보고 연해주의 활동가 들과 의병대를 조직한다. 이에 의군참모중장으로 참전해 두만강 인근 회령에서 일본군 1개 사단과 200명 규모의 의병들을 데리고 전투를 벌인다. 패퇴 시에 포로로 잡은 일본군 2명을 돌려보낸 것이 안중근을 의병군 사이에서 위기로 내몬다.
의병 투쟁이 여의치 않아 의열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한 안중근은 저 유명한 단지동맹을 12인 동지와 함께 결의한다.

연해주에서 몇 달 동안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로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강탈한 조선의 초대 통감인 이토를 토살하는 것은 굉장한 상징성을 보여줄 수 있고 그 파장이 만파로 퍼질 것이리라고 안중근 뿐만 아니라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한 번쯤은 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우덕순과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한다. 하얼빈은 19세기 말  재정러시아에 의해 건설된 다인종이 모여사는 특이한 지역.
러시아어 통역으로 유동하 대동. 이동 중 유동하는 집안사정으로 돌아가고 <대동공보> 주필 이강의 소개로 하얼빈에서 세탁업하는 조도선을 만남.
김성백의 집에 여장을 풀고 거사를 준비함.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들이 자유롭게 이토를 환영하기 하얼빈 역의 검문검색을 하지 않았다.
9시 15분 경에 도착한 이토가 기차에서 내리자 의장대 사이를 유유히 걸어가서 세 발을 이토라 짐작이 되는 늙은이에게 발사한다.
흉부와 복부에 명중하였고, 이토의 얼굴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토의 주위에 있던 3 명을 연달아 쓰러 뜨렸다.

뜨거운 가슴과 차분한 머리에서 나오는 담력과 침착함. 그 살떨리는 와중에 6발 모두를 명중시키는 용력. 한국 현대사에서 이처럼 위대한 실천적 지식인이자 무인이 또 있을까 ?
쓰러지는 이토를 확인하고서는 대한독립만세를 3번 외쳤다. 그리고 러시아 군인에게 체포 된다. 
러시아 검사에게 수사를 받고 동조자를 수색하여 우덕순과 조도선을 체포한다.
이외에 김성백과 한인 6명을 더 체포한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외교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하여 일본으로 안중근, 우덕순을 포함하여 체포한 한인 8명을 모두 넘겨버렸다. 

 

1910년 3월 26일 사형일
25일은 순종의 건원절이라 황제 생일날 사형 집행하면 한국민의 반감이 극에 달할 것을 우려하여 26일로 정하였다 . 25일을 원했던 이유는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이라 신자로서 그 날을 원한 것이었다.

국내외적으로 안의사를 찬양하는 시들이 흘러 넘쳤다.
안의사 사후 가족들은 연해주, 만주, 상해로 망명의 길을 떠났고, 그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장남은 일제가 독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그외 정근, 공근 형제는 백범 선생과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안의사의 휘호
여순 감옥에서 엄청난 수의 휘호를 썻으며 일제 헌병과 간수들이 안의사의 심성에 반하여 서로 휘호를 얻으려고 경주했다고 한다.  그중 매체에 많이 소개된 것이 "위국헌신 군인본분" 헌병 간수인 지바 도시치에게 써준 것으로 지바는 죽을 때까지 안의사의 위패를 모셨고 그 조카딸이 80년까지 위패를 모시다 이 휘호를 한국으로 반환했다고 한다.

 

빌렘 신부의 안중근 의사 면회, 고백성사 그리고 옥중 미사 집전에 대한 뮤텔 주교의 행태
안중근의 여순 감옥에 면회하여 성사와 미사 집전으로 빌렘 신부와 뮤텔 주교와의 갈등 안의사 사후 정근,공근 형제가 안의사 시신을 모셔가겠다는 뜻을 일제가 거부하였고, 뮤텔 주교는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는 뜻을 피력하였고, 이등박문의 장례식에 부의화환을 보냈다는 것.
이는 전형적으로 힘과 권력을 가진 약육강식과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의 개 노릇을 했던,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에서 식민지를 한낱 전교와 교세 확장 대상으로만 여기던 아주 야만적인 근대 가톨릭의 전형적인 성직자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뮤텔 주교는 1900년대를 전후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치부이다. 교세의 확장에만 혈안이 되었던 가톨릭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 바로 여기인 것이다. 성직자를 평신도와 하느님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고 자타칭 얘기한다. 그 다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놓이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뮤텔 주교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난과 절망에 찌든 사람, 하느님의 어린양들을 보지 못하고 그저 세상의 권세를 등에 업고 세력 확장에만 혈안이 된 이 사람이 과연 신을 따르는 사람인지는 구태여 말을 더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오염이라 생각된다.

 

 

그냥 저냥 떠오르는 생각에 대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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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감옥에서 헌병 감시 군인들의 마음까지 녹여버린 이 위대한 의사는 아직 우리 대한국인의 가슴에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그냥 저냥 교과서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어버렸다는 통쾌감 하나로만 남아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친일 매국노 일파와 그 후손이 국가와 민중을 유린하고 있는 이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 청산하지 못하면 청산당한다는 얼핏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한 말이 너무 슬프게 다가오는 저녁이다.

 

아직까지도 녹지않고 꽁꽁 얼어붙어 있는 따뜻한 동토의 땅.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시절 권력과 적국에 붙어 일신의 안위를 꾀했던 자들의 후손들이 그들의 조상 망령을 불어내어 얼어붙은 땅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국정 교과서 편찬을 위해 사악한 역사의 주인공들에 온갖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며 올바른 사관과 하나의 사관으로 국민적 대통합을 하자고 안달복달이다.  야당 인사들은 아무런 계획과 힘 없이 그저 징징대고 있고 일반 무산 대중은 현실의 꼬락서니를 그저 넋놓고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현실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발전적이고 긍정적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현 정부에 항의하는 시민들게는 불법적 국가 폭력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국내 사정이 교육을 필두로 해서 노동, 경제, 안보 분야 등 국가 권력과 시민 간에 흐르는 긴장감이 이승만과 군사독재 시절을 제외한다면 이토록 팽팽했던 시절이 있었는가 싶다.  또한 대외 정세는 미일 안보 동맹과 중국 간에 한반도의 지배 영향력을 높이려는 시도가 날이 갈수록 더 높아져만 간다.  팽팽하게 잡힌 줄 위에서 대한민국은 그 중심을 잘 잡아 넘어지지 않도록 버텨야 하는 시기인 것 같은데 이 정부의 수장은 하릴없이 꽃놀이만을 일삼고 있다.

 

2015.10.21. 머리 속에 하얗게 되어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무엇을 써야할 지 도무지 모르겠는 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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