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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 독서 이야기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도개손 부부 평전)

버들아 2015. 9. 29. 01:51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도개손 부부 평전)

 

 

 

나는 중국의 역사를 제대로 모른다.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맞겠다. 하지만 한국의 근현대사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백화점식으로 나열해 놓고 시험에 나올 수 있는 중요한 것부터 별표를 매겨가며 외웠던 지리멸렬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주입식 국사 교육이 전부였던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도 큰 영향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군 복무 시절 타 부대로 파견 나가 야간 초병 근무를 설 때 우연히 읽었던 역사와 관련된 소설을 읽고는 역사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대 후 IMF 시절 대학 졸업을 했을 때 오라는 곳도 없고 갈 곳도 없었던 시절 PC방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29살 느즈막한 청년 시절 이덕일 선생의 "당쟁으로 보는 역사"라는 책을 사서 읽었을 때 머리를 때리는 큰 울림이 있었다. 그 후로 이덕일 선생의 책을 읽는 재미가 나의 취미였다. 이덕일 선생의 책으로 시작하여 김기협 선생, 서중석 선생, 한홍구 선생, 김삼웅 선생, 함석헌 선생 그리고 유시민 선생 등 틈이 나는 데로 우리나라의 역사서를 탐독하고 있다. 읽을 때마다 나는 대학 시절을 문맹으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맨 처음 들었고 비록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지성인으로 발전하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갖게 했고 마지막으로 대학과 대학원을 나온 자가 이토록 이 사회와 역사에 이토록 철저하게 무관심한 시간을 보낼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내 과거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강도 일제가 강탈한 나라, 드넓은 만주, 연해주, 러시아 그리고 중국에서 해방될 조국의 이상을 그리며 앞으로 건설할 조선의 미래상을 위해 독립운동가(혁명적 사상가, 지식인과 행동가들)들은 거대하고 다양한 담론을 쏟아내며 철저하고 투철하게 삶을 살다 가셨다. 아쉽게도 광복 후 개인의 영달 외에는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이승만과 그 뒤를 쿠데타로 권력을 강탈한 박정희. 이 두 사람이 반공을 제 1의 국시로 여기고 붉은 색은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지워버렸다. 아니 철저히 권력 유지를 위한 살벌한 도구로 활용했다.

 

중국에서는 비폭력적 외교를 통한 독립 노선을 걸었던 상해 임시정부,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인테리의 노동현장 투입을 통한 무산자 민중해방 운동 노선을 걸었던 북평(북경)의 사회주의 독립운동 그리고 무장의혈투쟁을 통한 독립운동 노선을 걸었던 아나키스트들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개인적 생각). 만주의 독립운동은 차지하더라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후세에 철저히 무시되어 왔다. 반공을 국시로 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노태우까지 때만 되면 적절히 붉은 색 컴플랙스를 정치적으로 적절히 이용해 왔고 해방 후 미군 세력과 이승만을 등에 업은 친일매국노들이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 몰이"로 역공을 취하면서 해방 된 조국에서 도적과 주인의 위치가 전도가 되어 버렸다. 이런 환경 하에서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김찬/도개손 항일혁명가 부부가 한국에 소개되어 후세에 알려지기란 상식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건 노동 혁명운동과 일제에 저항한 철저한 꼬뮤니스트 한/중 부부가 28, 27세라는 안타까운 나이로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국제공산당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 공산당의 예하로 배속되었다. 10살에 중국 북경으로 전 가족이 망명을 해서 노하중학교에서 학업중이던 김찬은 사회주의에 눈을 뜨고 일찌감치 공산청년단과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북경에서 활동 하면서 중국의 상류 지식인의 딸 도개손을 만난다. 이 둘은 각자의 조국을 위해 항일 혁명 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한다. 향후 둘은 부부가 되며 김찬은 조선의 진남포로 도개손은 북경에서 항일 독립 운동에 참가하고 국민당의 공산당 탄압과 일제의 만주와 화북지역 침공으로 인해 이 둘은 상해, 북경, 만주 등을 오가며 중국 공산당 재건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김찬은 김단야, 박헌영, 김형선, 김명시 및 동생 김순경 등과 함께 조선 공산당 건립을 위해 노력한다. 소련 코민테른의 연결책 및 조선공산당 총책인 김단야의 지시로 김형선과 함께 김찬은 조선으로 밀입국하여 김찬은 진남포에서 김형선은 경성에서 노동혁명운동을 위한 작업에 매진한다.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의 진남포로 밀입국하여 노동해방을 위한 파업투쟁을 주도하였고 두 번째 밀입국 시에 묵었던 여관 주인의 밀고로 일경에 체포된다. 한편 세 번째 경성에 잠입한 김형선이 마침내 일경에 체포되고 중국에 머물던 조봉암 등도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된다. 이 후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혁명 운동은 그 씨가 말라 버린다.

 

1930년대 후반에는 일본 만주괴뢰국의 노골적인 중국 화북지역, 상해, 남경 침공 그리고 국공 내전으로 인한 공산당 탄압 등으로 중국 공산당은 암흑기를 맞이한다. 이에 김찬/도개손 부부는 국민당의 탄압에 맞서 상해에서 끝까지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분투했지만 실패했고, 북경으로 다시 만주로 다시 북경으로 그 후 처가가 있는 무석으로 이동한다. 이 후 자신들의 혁명운동을 위해 1937년 혁명운동의 성지 연안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 시기에는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제8로군으로 배속된다. 희망을 안고 연안으로 옮긴 그 판단이 그 젊은 부부에게는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 버렸다. 중국공산당의 최대 간신이자 대음모가인 강생의 음모로 이 둘은 너무나 어이없이 총상형에 처해진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들이 일제 첩자로 낙인이 찍혔을까 ? 작가인 원희복 선생은 몇 가지로 추측을 하고 있다. 일제의 중국 대지주와 한인 소작농 사이의 이간책으로 인한 중국공산당 내에서의 배한감정, 이름없고 나라도 없는 조선의 보잘것 없어 보이는 청년을 사랑한 중국 최고 집안의 여인 간의 사랑이 중국의 지식인 남성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불러 있으켰으리라는 짐작 그리고 공산당 내의 일제 첩자를 속출하기 위한 강생의 무리하고 무모한 판단이 이 부부를 죽음으로 몰았으리라 생각했다. 이후 43년 만에 부부의 아들 김연상 선생과 도개손의 언니들의 노력으로 명예회복은 되었지만 너무나 안타까운 죽음이다. 독립운동가 김산(장지락)에 대해서는 님 웨일스 라는 아주머니 작가가 그 원혼을 조금이나마 달랬다면 이 부부의 억울한 혼을 원희복 선생의 책이 조금이나마 달랬으면 하는 바램이다.

 

2015.09.29. 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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