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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 독서 이야기

7년의 밤

버들아 2019. 12. 17. 01:01

 

 

 

정유정 / 은행나무

오랜 만에 아주 긴 장편소설을 읽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눅눅하게 습기 찬 음산한 오지를 헤매다 실실 기어 나오는 기분이다. 

우리 삶은 사건(사실)의 연속이다. 행과 불행은 늘 양면이다. 그 명백한 사실의 연속선에서 나는 내가 추구하고자하는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때가 많다. 일련의 사실(사건) 속에 파묻혀 내가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 건지 잊어버릴 때가 많다. 또 그 속에서 허둥대다보면 내가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는 지 진실을 바라볼 용기를 잃어버리는 때가 많다. 사실 우리는 삶 속에서 제대로 그런 교육이나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내 앞에 어떤 선택지가 놓여 있을 때가 많다. 어느 쪽을 선택하면 후회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순간의 유혹, 찰나의 안일함, 잠깐의 안도감을 위해 먼 미래의 불행을 선택한다.  최현수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당할 수 있는 교통사고에서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의 안도감을 선택한다. 사고를 당해 혼절한 어린 소녀를 세령호로 유기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은 최현수는 한때는 유망한 야구선수였다. 어린 시절 폭력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야구를 그만 둔 후 요즘 말로 찌질 한 가장으로 전락해버린다. 보안회사에 다니던 중 새로 발령받은 보안팀장으로 오기 전날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세령호에 머물 사택을 둘러보러 떠난다. 미적대던 현수는 오든 길에 친구들과 술을 먹게 되고 음주운전 중에 안개가 짙은 세령호수 길에서 사고를 내게 된다. 


사고를 당한 세령이는 오영세의 딸이다. 사이코패스적인 오영세는 세령호 수몰지역의 유지 출신이다. 아내와 딸을 개인 소유물 정도로 여기며 말을 듣지 않으면 여지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정신병 환자에 가깝다. 사고 당일도 오영세는 자기를 피해 잠적한 아내를 찾다가 자기 딸인 세령을 폭행한다. 세령이가 아빠를 피해 도망가다가 짙은 안개 때문에 최현수가 몰던 마티즈에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게 되고 정신을 잃게 된다. 혼절한 아이를 세령호에 던진다. 마침 호수에 수몰된 지역을 잠수 장비를 갖추고 구경하고 올라오던 승환은 던져지는 세령을 우연히 보게 된다. 

 

이 후, 오영세는 최현수를 의심하게 되고 복수의 준비를 한다. 현수의 아들 서원을 세령호의 섬인 한솔등 나무에 매어놓고 수문을 닫아서 아들을 죽일 준비를 한다. 또한 현수를 댐 관리실에서 묶어서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게 할 요량이었다. 몸싸움 끝에 현수는 겨우 탈출하게 되고 승환을 아들을 구하러 보낸다. 동시에 댐의 수문을 열어 아들이 익사하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댐 밑의 저지대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수장시키는 사람이 된다. 즉 희대의 살인마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사건 후 최현수는 사형수가 되고, 승환은 서원이를 데리고 7년여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닌다. 수감 중인 최현수가 승환을 불러 사건을 소설로 기록하기를 바랬고, 오영세가 살아있어 서원이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이른다. 7년 동안 가는 곳 마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던 이유가 오영세의 음모였던 것이다. 승환과 서원 그리고 두 형사의 도움으로 오영세를 잡게 된다. 최현수는 사형 당한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이야기의 구성도 짜임새가 있고 소설 속에서 각 주인공들이 화자가 되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게 만드는 전개방식이 기존의 틀과는 달라서 생소했지만 몰입도가 높은 소설이었다. 

순간의 선택이다. 그러나 선택이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네 인생이 쌓아온 시간의 높이가 높고, 반성과 성찰의 시간의 깊이가 나름 깊다. 불행으로 치달을 수 있는 일련의 일들이 우리 앞에 놓인 경우가 많다. 때론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할 때도 있다. 후회할 것이라는 불안한 심리를 가슴 한켠에 안은 채... 

행복한 구석이 한 줌이라도 찾기 힘든 주인공들이다. 암흑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건을 맞아 공포와 불안의 연속인 삶에 종지부를 찍고 마지막 희망만은 건져 올려 보고자 하는 한 남자의 절규가 담겨 있다.  읽는 내내 심장의 쿵쾅거림이 있었다. 소설 속에 그만큼 빠져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오랜만에 쫄깃쫄깃한 심장을 맛볼 수 있었다. 

 

2019.12.17. 새벽 1시. 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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